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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고전 작성일 : 20-01-14 08:23

”60년대 배다리엔 솥가게만 6개, 없어서 못 팔 정도”
 글쓴이 : 我詩我 (211.♡.78.246)
조회 : 2   추천 : 0  
 

60년대 배다리엔 솥가게만 6개, 없어서 못 팔 정도”


인천 유일한 솥가게 운영하는 오정신 어르신



▲ 오정신(77) 어르신

60,70년대 우리네 부엌에는 부뚜막에 무쇠솥이 걸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주물로 만든 무쇠솥은 밥도 짓고 국도 끓이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당시 무쇠솥은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생활용품이었다.


인천에서도 6,70년대 주물솥, 아궁이 집, 불판, 농기구, 기계용품을 만들던 주물공장이 여러 곳 있었다. 인천에서도 만화주물(萬和鑄物)을 비롯해 영신주물, 대흥주물, 동구주물, 만석동 주물 등 여러공장이 성업중이었다. 


이중 제일 큰 공장이 화교가 운영했던 만화주물이었다. 만화주물에서만 솥을 만들었고 다른 작은 주물공장에서는 농기구만 제조했다. 만화주물은 미추홀구 숭의동 349번지에 있었다.

만화주물은 경영자도 직원들도 화교로 이뤄진 화교자본이었지만 나중에는 한국인 직공들도 들어가 일을 배울 수 있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없어서 못 팔 정도였던 무쇠솥은 생활 환경의 변화와 새마을 운동의 시작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부뚜막이 사라졌고, 알루미늄과 스테인레스의 등장으로 무쇠솥은 주방에서 자리를 내줘야 했다. 가정에서는 쇠로 만든 솥과 식기를 대신해 가벼운 소재로 만든 주방기구들이 인기를 끌었다.


60년대 인천 배다리에는 주물솥 가게가 6곳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배다리는 인천의 최고 번화가였다. 주물솥 가게들은 주물산업 사양화로 하나 둘씩 사라지더니 이제는 단 한곳만 남았다.


아직 배다리에는 무쇠솥과 불판 등을 파는 유일한 가게가 유일하게 남아있다. 오정신(吳廷新, 77)어르신이 운영하는 '배다리솥' 가게다. 그는 배다리에서 50년 넘게 주물로 만든 무쇠솥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18세부터 솥을 팔았다. 충북 영동 황관에서 올라와 배다리 인근에서 친적이 운영하는 솥가게 직원으로 취업했다. 50년대 였다. 당시에도 솥가게가 5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솥의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 주물공장에서는 6.25 전쟁 직후라 전쟁 무기인 대포, 포탄 등을 녹여 솥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솥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인천의 최대 주물공장인 만화주물에서 일했다. 그가 만화주물에서 일했던 이유는 주물솥을 저렴하게 가져오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오 어르신의 기억에 의하면 만화주물의 사장은 4명이었다. 중국인 3명과 한국인 1명이 함께 경영하는 동업형태였다. 중국사장의 성씨는 주, 여, 국씨였고 한국인 사장의 이름은 김병두였다. 


만화주물공장은 성업중이었다. 주문이 많아 봄, 여름에는 새벽 4시~5시 작업을 시작해 저녁 9시 넘어야 일이 끝났다. 공장 직원들은 새벽에 출근했기에 공장에서 아침을 먹었다. 일반 직공들의 월급은 3천5백원~4천원이었고, 고급기술자들은 1만원을 받았다.


“당시는 주물솥 장사가 잘됐습니다. 지금은 가게에 솥들이 쌓여있지만 당시는 이 정도 물량은 하루, 이틀만 지나면 동 났어요, 말도 못하게 장사가 잘됐었지요.”






오 어르신은 70년대부터는 배다리에서 솥가게 장사를 독점했다. 전에 솥가게를 했던 분들이 나이가 많아 장사를 그만두자 그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만화주물이 부도나면서 남긴 거래처를 인수해 옹진 섬, 강화는 물론 충청도, 강화도 등 지방에도 솥을 대주었다. 


거래처였던 서울의 화교가 운영했던 화승주물이 폐업처리가 되자 그 물건을 가져와 판매했고 전국에서 솥을 사러 배다리로 올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도원역 부근에도 가게를 따로 내 운영했을 정도였다.


그는 솥을 팔아 부를 쌓았지만 부침도 있었다. 돈을 많이 벌자 주변의 유혹도 많았다. 사기도 당하고 직접 직원을 두고 주물공장을 운영하다 망하기도 했다. 


증권이 활황일때는 증권에 손대 손해를 보기도 했다. 그는 힘들거나 어려운 역경이 있을때도 항상 곁에는 솥이 있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솥은 그의 삶을 지켜준 힘이었다.


오 어르신은 90년부터는 혼자서 주물가게를 하고 있다. 주물산업이 어려워지면서 공장도 대부분 문을 닫았고 솥을 찾는 손님도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여럿 있던 직원들도 다 내보내고 주문이 들어오면 자전에 솥을 싣고 배달을 다녔다.


오 어르신은 건강 체질로 젊을 때부터 힘이 장사라는 소리를 자주들었다. 무쇠 솥도 거뜬히 들었다. 그는 솥가게 외에도 37세부터는 수영, 사이클, 마라톤을 연이어 하는 철인3종 경기에 나가 여러번 우승한 경험이 있다. 


태국, 인도,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서 열린 철인3종경기에도 선수로 나가 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지금은 수영을 하며 체력을 다지고 있다.




오 어르신은 80살이 내일 모레지만 오늘도 배다리 솥가게 문을 연다. 손님이 오면 팔고 없으면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키다 집으로 돌아간다. 


아직도 그의 가게에는 큰솥, 작은솥, 삼발이, 고기구이용 난로 등 주물로 만든 물건들이 쌓여 있다. 무쇠솥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판매처를 찾다 결국 그가 운영하는 가게로 오는 경우도 많다.


“큰솥은 천안 장성주물에서 가져오고 작은 것은 광주 화교주물공장인 동창주물에서 가져옵니다. 국내에는 솥을 만드는 공장이 사라져 중국에서 솥을 많이 수입하고 있습니다.”


주물은 이제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공장을 운영하려는 사람도 없어 이제 곧 골동품이 될 처지에 놓여있다. 오정연 어르신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솥 가게를 몸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할 생각이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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