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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고전 작성일 : 20-10-29 15:51

비류가 도읍을 정한 옛 인천의 중심
 글쓴이 : 我詩我 (124.♡.154.220)
조회 : 1   추천 : 0  
 

비류가 도읍을 정한 옛 인천의 중심



문학·관교동

 

바람은 열린 곳으로 분다고 합니다. 바람이 부는 방향엔 길도 열려 있게 마련입니다.

인천시민을 사랑하는 인터넷신문 ‘i-view’가 새로운 기획 ‘바람결 따라 골목길 걸어’를 연재합니다. ‘바람결 따라 골목길 걸어’는 이 시대 인구 300만의 인천이란 도시의 속살을 만나는 특별기획입니다. ‘i-view’는 인천사람들이 살아가는 ‘우리 동네’를 하나하나 찾아가 그들 삶의 이야기와 자연을 만나고, 문화유산, 집, 전통시장 같은 공간과의 대화도 시도할 것입니다. 인천의 하늘 아래 우리 인천시민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땅과 마을의 참모습을 그려보겠습니다. <편집자>


인천의 진산(鎭山)은 ‘문학산’(文鶴山)이다. 진산은 고을을 지키는 큰 산을 말한다. 조선시대 ‘도호부관아’는 진산 가까이에 위치했다. 인천도호부관아가 문학산 아래에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계양산을 인천의 진산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계양산은 인천의 진산이 아니라 ‘부평의 진산’이다. 계양산 아래 ‘부평도호부관아’가 있는 까닭이다.

한적한 바닷가마을이던 제물포가 1883년 개항되기 전까지 인천의 중심은 문학산(217m)이 펼쳐진 문학·관교동이었다. 관교동의 ‘관’과 ‘교’는 인천도호부관아와 인천향교를 조합한 이름이다.

중심이긴 했으나 도호부관아와 향교가 있었을 뿐 문학·관교동은 1990년 이전까지만 해도 전원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개항 이후 개항장인 제물포(중구)가 중심이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 문학산 정상은 군부대가 철수한 뒤 2015년부터 부분개방을 시작했다.2020년 10월 15일 '제56회 인천시민의    날'을 맞아 개방시간을 새벽 5시~밤 10시로 확대했다..




일제가 방위에 따라 아무렇게나 지은 ‘남구’ , ‘미추홀구’로 바로잡아 


문학·관교동이 속한 ‘미추홀구’(彌鄒忽區)는 2018년 7월1일 전까지 ‘남구’(南區)였다. 일제가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아무렇게나 붙였던 구의 이름을 바로잡은 것이다. 남구가 미추홀구로 이름을 바꾼 뒤 동구는 화도구, 중구는 제물포구, 서구는 서곶구로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아직 진척한 건 없다.


문학·관교동에서 가장 먼저 언급할 수밖에 없는 콘텐츠는 단연 문학산(217m)이다. 문학산은 인천의 시조 ‘비류’가 BC18년 세운 백제의 2,000년 건국 설화를 품은 인천의 진산(鎭山)이다.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문학·관교동 일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의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문학산의 또 다른 이름은 ‘배꼽산’. 산봉우리의 봉화대가 사람의 배꼽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인데 인천 사람들에겐 낯설지 않은 명칭이다.


문학산 정상을 빙 에둘러 쌓은 ‘퇴뫼식 산성’인 문학산성은 일찍이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삼국시대 축조한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이 백성들과 함께 왜군을 격멸한 ‘승전의 성’이기도 하다.

문학산 정상을 빙 에둘러 쌓은 ‘퇴뫼식 산성’인 문학산성은 삼국시대 축조한 성으로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문학산성 아래 있는 ‘돌 먹는’ 나무.




문학산 정상부 올 ‘시민의 날’부터 새벽 5시~밤 10시 확대 개방

 


예전이나 지금이나 군사요충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전쟁과 같은 사변이 났을 때 연기나 불을 피워 알리던 봉수대가 있던 문학산 정상부엔 1959년 군부대가 들어선다. 이어 1962년~1979년 미군이 주둔했는데 이 때 산정상부를 평평하게 깎아놓는다.


미군 철수 이후엔 우리 공군의 ‘나이키미사일’ 통제소가 있었는데 1998년 인천 봉재산 미사일 오발 사고 이후 2005년 영종도로 이전한다. 그렇지만 인천시민들은 문학산 정상부에 오를 수 없었다. 군사안보상의 이유로 정상부의 시민접근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인천시와 군 당국과의 꾸준한 협의 끝에 문학산 정상부가 처음 개방된 때는 5년 전인 2015년 10월 15일이다. 그러나 오전 8시~오후 7시까지만 개방하는 ‘반쪽개방’이었다.


인천시는 이후 국방부와의 꾸준한 논의와 설득을 통해 2020년 10월17일부터 새벽 5시~밤 10시로 개방시간을 확대했다. 개방 전날인 10월16일, 박남춘 인천시장과 인천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상부에서 열린 축하행사에선 소원을 비는 바람개비 달기와 포토존 행사가 열렸다.


박남춘 시장은 “문학산이 영원히 그리고 온전히 인천시민의 자랑으로 남게끔 더욱 세심하게 살피겠다”며 문학산을 온전히 시민들에게 돌려줄 것을 약속했다.



문학산 정상엔 군부대가 주둔했다가 철수한 뒤 2015년부터 부분개방을 시작해 2020년 ‘56회 인천시민의 날’을 맞아 지난 10월17일부터 개방시간을 확대했다.



인천도호부관아, 인천향교 등 옛 인천의 중심 흔적 남아


문학산 자락 끝엔 인천도호부관아와 인천향교가 자리한다. 도호부관아는 고을을 다스리는 관청이고 향교는 백성들의 교화, 관리후보군 양성, 문묘향사의 기능을 수행한 곳이다. 지금의 인천도호부는 <인천부읍지>와 <화도진도>를 근거로 2001년 완공한 건축물이다. 실제 인천도호부관아(시 유형문화재 1호)는 인근 문학초등학교 안에 1개동이 남아 있다.


인천향교는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향교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부평향교에 통합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46년부터 복구를 시작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인천시 유형문화재1호인 조선시대 인천도호부관아. 현재 문학초등학교 안에 1개동만 남아 있다.

인천도호부관아는 <인천부읍지>와 <화도진도>를 바탕으로 2001년 완공한 건물이다.



 

시골마을로 있다 1985년 택지개발 이후 지금 모습으로 변모


인천의 중심이었던 문학·관교동은 개항(1883) 이후 중심지가 개항장인 제물포(중구)로 옮겨가면서 한 세기 넘도록 평범한 시골마을의 모습으로 자리해왔다.


문학·관교동이 지금의 모습을 갖기 시작한 때는 1985년 관교동이 ‘구월지구 택지개발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부터이다. 1990년 관교중학교가 개교하고 동아, 풍림, 쌍용과 같은 아파트단지와 주택들이 들어서고 중앙공원이 조성됐다. 신세계백화점은 소유주가 바뀌어 롯데백화점이 됐고, 인천종합터미널이 건설되면서 다시금 인천의 중심지 면모를 되찾아가고 있다.

문학산에 있는 부대막사를 개조해 지은 문학산역사관


인천의 유서 깊은 지역인 문학·관교동엔 2014년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이 건립됐다. 인천도호부관아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은 27개 무형문화재 단체를 중심으로 인천무형문화재의 원형보존과 계승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중이다.


사무실, 공방, 공연장, 연습실, 홍보관, 전통문화체험관, 야외공연장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전시, 공연, 세미나 등도 열리는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비류가 도읍으로 정한 문학산은 임진왜란 때는 문학산성을 중심으로 왜병을 물리치는데 앞장섰고, 조선말 이양선이 출몰했을 땐 나라를 지키는데 최일선에 있었다. 미추홀구 문학·관교동은 전통유산과 최첨단 현대생활이 공존하며 인천의 중심 위상을 다시금 찾아가는 중이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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