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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시사 작성일 : 18-04-06 18:43

죽은 소 버리기 아까워 먹었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글쓴이 : 我詩我
조회 : 74   추천 : 0  
 

죽은 소 버리기 아까워 먹었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충주와 단양 주민의 겨울 난리 체험기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피난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채종석 가족은 그야말로 거지부대였다. 스물두 살의 채종석은 할아버지 채승묵과 아버지·어머니와 누님, 동생, 백부, 숙부 가족 약 10명과 함께 터벅터벅 충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섣달그믐을 며칠 앞둔 1951년 2월 초 충주날씨는 너무나 매섭기만 했다. 손과 발은 동상이 걸린 지 한참이나 되었고, 입술과 얼굴은 부르터 새빨간 피가 시퍼런 얼굴에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짧은 1주일간의 피난길이었지만 고생은 죽어라고 하고 패잔병처럼 땅만 바라보며 다리를 움직였다. 먹은 거라고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미 등가죽이 뱃가죽에 붙어버린 지 오래다. 귀가 얼어붙어 얼굴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청주에서 200리(80km)를 걸어 충주에 도착했지만 채종석의 안식처가 있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채승묵의 고향인 금가면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원래 귀착지인 엄정면 원곡리까지 가기에는 50리(20km)나 남았는데, 할아버지 건강은 위태롭기만 했다. 할아버지 채승묵을 금가면의 친척 집에 모신 후 다시 엄정면으로 향했다. 

 

가족 중 누구도 입을 뻥긋하지 않았다. 추운 것도 그렇지만 배가 너무 고파 입을 열 힘도 없기 때문이었다.

 

엄정면 면소재지에 도착했을 때 채종석(90세. 충주시 엄정면 원곡리) 가족일행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군이 원곡리에 불을 질러 멀쩡한 집은 한 채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왜요?" "그걸 내가 어찌 아누. 지금 마을에 가면 모두가 초상 집이여"라는 소리에 맥이 쭉 빠졌다. 그렇다고 다른 데로 갈 곳도 없었다. 

 

갈 곳이라고는 고향인 엄정면 원곡리 뿐이었다. 밤늦게 마을에 도착했을 때 집의 형체는 온데 간데 없고, 흰 점과 검은 점만 보일 뿐이었다. 흰 점은 눈이고, 검은 점은 집이 타다 남은 재였다. 

 

울 힘도 없었다. 채종석 집만 타 버렸으면 원통해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하건만, 모든 집이 불타 버렸으니 무슨 말을 하랴.... 일주일간 집을 비운 사이 100호가 넘는 원곡마을은 초토화가 되었다.

 

20관(75kg)짜리 돼지가 보이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 중 먼저 피난 갔다 온 이들이 먹을 게 없어서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나마 소 두 마리를 피난길에 동행시킨 것이 다행이었다. 출발할 때는 식량운반용으로 생각한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주요 재산을 보존한 격이었다.

 

그런데 그 소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겨울 피난길에 고생한 할아버지가 금가면으로 온 지 일주일 만에 사망하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소를 팔아 버린 것이다.

 

▲ 엄정면 피해지도 미군에 의한 엄정면 피해지도  ⓒ 박만순

 

죽은 소를 잡아먹고 장질부사 걸려

 

미군이 무서워서 피난했던 충북 단양군 단양읍 노동리와 마조리 주민들은 숨이 턱 막혔다. 미군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온 주민들은 망연자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개 마을 합쳐서 210호나 되는 가구들이 모두 불 타 버렸기 때문이다. 우선 당장 엄동설한에 몸을 누일 곳이 없었다.

 

불 탄 집에서 '뭐라도 건질 게 없나' 하고 찾았지만, 나오느니 절망과 한숨뿐이었다. 비상식량으로 남겨두었던 곡식은 새까맣게 탔고 이불, 옷가지와 가재도구는 형체조차 없었다.

 

또한 집안의 가장 소중한 재산인 소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충북 충주시 엄정면 일부 주민들은 피난길에 소를 데리고 가 피해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단양 노동리·마조리 상황은 전연 달랐다. 

 

1951년 1월 10일부터 3일간 진행된 미 지상군의 초토화 작전은 가재도구와 가축을 챙길 여유를 주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군은 1951년 1월 10일 노동리·마조리에 진입하자마자 총을 쏘았다.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던 주민들은 본인 몸 하나 피신하기에 바빴다.

 

피난길에서 마을로 돌아 왔을 때, 주민들이 마을 별로 피해상황을 조사해보니 두 마을의 모든 소가 미군의 총격에 죽었다. 죽은 소의 숫자는 180두였다.

 

거의 한 집에 한 마리씩 소가 있었는데, 살아남은 소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서학출(1934년생. 2008년 작고)은 "피난 갔다 왔더니 소가 모두 죽었더라구요. 

 

사람들이 먹을 게 없다 보니까, 죽은 소를 먹었어요. '한겨울이다 보니까 소가 부패되지 않고 얼어 있으니, 먹어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죽은 소를 먹은 사람 태반이 장질부사(장티부스)에 걸려 고생하고, 일부 주민들은 죽었어요"라고 증언했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던 소가 두 개 마을에서 싹쓸이 당하고, 죽은 소 버리기가 아까워 먹은 주민들은 다시 병에 걸리거나 죽은 것이다. '지옥'이 있다면 1951년 1월 단양군 노동리와 마조리가 지옥이 아니었겠는가.

 

교회가 있는 마을만 화를 면해

 

◀ 유봉교회 종탑 1903년에 설립된 유봉교회 종탑  ⓒ 박만순

 

충주시 엄정면 원곡리 100호가 넘는 가구가 모두 불에 타 버렸는데, 비극은 원곡리에만 그치지 않았다. 

 

원곡리에 인접해 있는 유봉리, 가춘리, 추평리의 상황도 동일했다. 가춘리에서 100호, 추평리에서 20호가 타 버렸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유봉리였다. 유봉리는 소림, 싸리재, 수풍말, 버들골, 막골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싸리재 60호 가구 중 3~4집만 타고, 나머지 집은 모두 온전했다.

 

그런데 나머지 4개 자연마을 140호 가구는 한 집도 예외 없이 모두 타버렸다. 

 

그러면 왜 싸리재만 온전했을까? 비밀의 열쇠는 '유봉교회'였다. 대한예수교 장로교 '유봉교회'는 일제강점기인 1903년에 설립되었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115년 전에 만든 것이다. 산과 바위를 병풍삼아 있는 산속 마을에 교회가 만들어졌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유봉리 싸리재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유봉교회' 때문에 마을의 화를 면했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인지 명확한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가는 부분이다. 

 

미 지상군이 엄정면 동북부지역에 있는 4개 마을을 모두 불태우면서 유독 싸리재 마을만 보존한 것이 '유봉교회' 때문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집을 잃은 사람들이 당장 거처할 곳이 문제였다. 유봉리 막골 공재석(당시 12세. 엄정면 유봉리)은 "통나무집을 임시로 짓고 살았어요. 

 

산에서 나무를 베어 기둥을 쌓고 진흙으로 바람을 막았지요. 지붕은 나무와 짚을 이용해 비·바람만 간신히 막았어요. 통나무로 만든 움집에서 3년을 넘게 살았어요"라고 한다. 1951년 그해 봄은 지옥 그 자체였다.

 

먹을 게 없어 쑥을 뜯어다 밀가루를 잔뜩 묻혀 먹었고, 산에 있는 봄나물에 먹을 것을 전부 의존했다. 미군들이 가축을 총으로 쏴 모두 죽이고, 잡아먹었으니 농사지을 방법이 없었다. 

 

결국 사람이 소 역할을 했다. 쟁기를 어깨에 메고 끌고 다녔다. 공재석씨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세월이었다. 빨갱이 잡는다는 명분으로 미군이 충주 엄정면 4개 마을 360호에 불을 질렀지만, 북한군은 한 명도 붙잡지 못했다.

 

마을 초입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

 

노동리 마을 표지석  ⓒ 박만순

 

소백산자락에 있는 충북 단양군 단양읍 노동리와 마조리는 밤에는 인민군세상이었다. 

 

북상길이 막힌 인민군은 1951년 1월 9일 마을로 내려와 잠자리와 음식을 요구했다. 

 

총을 이길 장사는 없다. 주민들은 살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단양읍 상진리와 중도리에 주둔하던 미군의 귀에도 이 정보가 들어갔다. 1월 10일 미군은 단양읍에서 노동리와 마조리를 향해 포를 쐈다. 이 포격으로 인민군 한명이 즉사했다. 포격에 기겁한 인민군은 모두 소백산으로 몸을 피했다.

 

날이 밝아오자 미군은 단양읍에서 더 가까운 노동리에 진입했다. 이날 미군들은 지상군뿐만 아니라 비행기로 노동리를 폭격했다. 

 

당시 노동리에는 석탄탄광이 있었는데, 사택에 있던 노동자 40여 명이 미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사망했다. 또한 탱크를 앞세운 미군은 마치 '적들을 토벌한다는 자세'로 기세도 등등하게 진주했다.

 

1차 포격에 죽음을 면한 탄광사택 노동자들은 화약고로 몸을 피했고, 주민들은 노동동굴, 방공호에 숨었다. 노약자들은 집 방문을 이불로 가리고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있었다.

 

통역도 데리고 오지 않은 미군들은 주민들에게 몇 가지 물었다. 하지만 당시 마을 주민들 중에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지식인은 없었다. 젊은 사람 중에 일부가 'OK'라는 단어만 알 뿐이었다. 

 

미군들이 주민들에게 정확히 무엇을 물어 보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정황에서 미군이 북한군의 소재를 추궁했음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OK"라는 대꾸를 했다. 그 소리에 흥분한 미군은 대꾸한 사람을 총살했다.

 

미군의 살육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마을 초입 가옥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겨울 난리에 피난 가지 못한 노약자들이 집에서 뛰쳐나왔다. 

 

이들은 미군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조준사격으로 모든 사람이 세상을 등졌다.  살육 대상은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소, 돼지 등 가축들이 놀라서 우리에서 뛰쳐나오자 움직이는 모든 것에 총격을 가했다. 미군의 방화와 총격으로 주민 200명이 죽었으며, 가옥 210호가 전소되고, 소 180두가 죽었다.

 

이 상황 속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미군이 만삭의 임산부를 강간한 것이다. 또한 대낮에 젊은 여성을 미군들이 윤간하기도 했다. 

 

도망가느라 정신없는 상황이지만 주민들은 백주에 노상에서 벌어지는 짐승 같은 행위를 모두 목격했다. 

 

김학선(85세. 단양읍 마조리)씨는 "어느 누구도 항의를 못했어요. 미군이 무서워 도망가기 바빴어요. 짐승 같은 놈들이 무서워서요" 라고 한다.

 

김학선 증언자 김학선  ⓒ 박만순

 

소백산 자락 마을에서 있었던 미군의 만행을 기억하자

 

1951년 1월과 2월에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은 단양읍 노동리·마조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단양군 영춘면 곡계굴에서도 네이팜탄을 포함한 폭격과 기총소사로 300명 넘는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또한 경기, 강원, 경북 지역 등 에서도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것은 1950년 11월 맥아더의 지시에 의한 초토화 작전이 남한지역에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경북 예천 산성동 사건도 이의 일환으로 벌어진 것이며, 노동리·마조리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미 지상군이 마을에 들어와서 집을 일일이 방화하고, 주민들을 조준 사살한 만행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앞서 언급한 만삭의 임산부를 강간하고 젊은 여성을 윤간한 행위는 어떤 변명으로도 합리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잊고 살고 있다.

 

아니 전후세대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이루다 보니 전쟁을 잊은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다. 2018년 2월 현재 대한민국 인구는 약 5100만 명이다. 

 

그런데 이중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68세 이하 인구는 약 4500만 명이다. 즉 인구의 88%가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전쟁의 아픔을 외면하고 남북관계 개선이나 통일문제를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다. 

 

남과 북, 미국 어느 국가나 집단이라 하더라도 전쟁기간에 벌인 민간인학살과 전쟁범죄는 수십 년, 아니 수 백 년이 지나더라도 잊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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