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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맛-고전 작성일 : 18-11-06 12:20

오래된 가게, 인천 노포(老鋪) ⑭​ ​회락춘
 글쓴이 : 我詩我
조회 : 4   추천 : 0  
 

오래된 가게, 인천 노포(老鋪) ​ ​회락춘


인천도시역사관에서는 2017년부터 “인천의 오래된 가게”에 대해 조사를 실시해 오고 있습니다. 오래된 가게의 정의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한 곳에서 대를 이어 50년 이상 영업을 이어오고 있는 가게를 조사 대상으로 정했습니다. 70여 개 가까운 가게가 조사되었지만, 그 중 16개를 선별하여 연재합니다.


인천에서 중국집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이 공화춘을 비롯한 차이나타운의 중국집일 것이다. 화교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고, 짜장면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며, 지금도 오래된 가게들이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차이나타운이 아닌 조금 특별한 곳의 중국집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부평 산곡동에서 대를 이어 중국요리를 파는 이곳이 14번째 오래된 가게, ‘회락춘’이다.


▲회락춘 전경




1억원을 벌어들이는 가게


가게를 처음 열었던 유문의 사장은 1900년 산동에서 태어났다. 유문의 사장에게 있어 산동은 좁은 곳이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했던 그는 산동을 떠나 상해에 머물다가 서울의 한 벽돌공장의 공장장으로 취업하여 한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국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일본이 패망하였고, 직장이었던 벽돌공장이 적산기업으로 넘어가면서 유문의 사장은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일을 그만두고 다시 산동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으로 건너가는 길이 막혔다. 이에 수원으로 피난을 가게 되면서, 유문의 사장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장장을 그만둔 후 따로 직업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쟁 중에 화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식당 밖에 없었다.


​주방에서 조리중인 유치부 사장


그렇게 생계를 고민하던 유문의 사장은 우연히 부평에 미군기지가 들어설 것이라는 말을 듣고, 부평으로 건너와 지금의 자리에 가게를 차렸다. 미군을 상대로 중국집을 하면 장사가 잘될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가게 이름은 ‘1억원을 벌어들이는 가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억춘’이라고 지었다.


가게를 열고나니 장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손님으로 원래 예상했던 미군들뿐만 아니라 백마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나온 관객들도 많이 찾았다고 한다. 특히 백마극장에서 공연을 진행했던 사람들이 회식 장소로 자주 찾아오기도 했다. 오죽하면 원래 공갈빵을 만들어 팔았던 이웃이 일억춘이 장사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중국집을 개업할 정도였다.




모임이 즐거운 가게, 봄을 잇다


지금 현재 운영하고 있는 2대 유치부 사장은 유문의 사장이 한창 일억춘을 운영하고 있었던 1956년에 태어났다. 원래 유 사장은 가게를 이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 사장이 초등학생이었던 시기 아버지인 유문의 사장이 중풍으로 쓰러졌고 결국 얼마못가 사망하였다. 


후계 교육을 얼마 받지 못한데다가 어머니 혼자서는 가게를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게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유 사장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상경하여 식당에서 잡일을 하는 등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1979년에 아버지가 운영하던 일억춘의 자리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가게를 다시 잇기로 결정하였다.


▲회락춘의 볶음밥과 짬뽕


그 당시 일억춘이 있던 자리에는 ‘아강춘’이라는 가게가 있었는데, 아강춘의 사장은 유 사장에게 춘(春)이라는 글자를 버리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유 사장은 아버지의 가게 이름에도 춘이 들어갔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봄(春)을 담았다.


그리고 유 사장은 아버지가 바랐던 1억원의 가치보다는 ‘모임이(會) 즐거운(樂) 곳’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회락춘’이라 가게 이름을 정하였다.


회락춘을 개업한 후에도 일억춘 때와 같이 장사는 잘 되었다. 특히 1980년대가 최대 호황기였다. 가게 앞으로 마을버스가 지나가면서 오며가며 들르는 손님이 많았고, 특히 가게 건너편의 베어링 공장이나 삼익악기 공장에서 단체손님이 많이 왔다고 한다. 


나중에 베어링 공장이 이전하면서 공장 사람들이 가게도 같이 이전하자고 제의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운 곳이었다. 또 회락춘이라는 이름답게 친목계 모임 장소로도 자주 이용되었다고 한다. 




세월을 이겨온 가게, 그리고 재개발


장사가 잘 되던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회락춘에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단골이었던 베어링 공장은 이전하였고, 삼익악기 공장도 1996년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많았던 단골들은 줄어들었다. 게다가 산곡동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드나드는 사람들도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손님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유치부 사장의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 건강이 안 좋아지자 장사를 잠시 쉬기 위해 지금의 가게 자리에 임대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1년도 안되어서 세입자가 나가게 되니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세를 주는 동안 원래 가게의 흔적도 많이 사라졌다. 


내년부터는 산곡동에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지금 가게의 자리도 사라질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유 사장은 가게를 계속해서 이어나갈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두게 될지 고민하는 중이라고 한다. 


회락춘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 큰 글씨가 적혀있다. 초재진보(招財進寶), 재물을 부르고 귀중한 것이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가게가 여기서 사라질지 혹은 더 이어가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모임이 즐거운 이 가게에서 재물과 귀중한 것이 들어오길 염원했던 마음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글 최병훈 인천도시역사관 연구원, 사진 조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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